4월 미시건주 워런에서 열린 행정부 출범 100일 기념 행사에서 연설하는 밀러(오른쪽)를 미소짓고 바라보는 트럼프 대통령. 워런=AP 뉴시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도심 상점가에서 6일(현지 시간) 불법 체류자들이 대거 체포된 직후 시위가 벌어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방위군 및 해병대를 시위 진압에 투입하라는 초유의 명령을 내리며 급격히 긴장 수위가 올라갔을 당시 백악관에서는 모두 의도된 일이라는 뜻을 내비쳤다.
시위 닷새째인 10일 한 백악관 관계자는 NBC뉴스에 “이 싸움을 하게 되어 기쁘다. 정치적 승리를 거뒀다”고 밝혔다. 같은 날 다른 백악관 관계자도 폴리티코에 “이보다 훌륭한 각본을 짤 수가 없다. 이민 문제는 트럼프에게 표를 가져다준다”며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로스앤젤레스 단속과 시위 대처 방식을 두고 2016년 트럼프 대선 캠프 때부터 이민정책을 설계한 스티브 밀러 백악관 부비서실장의 스타일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폭 지지하는 최측근 참모인 그에 대해 살펴봤다.
● “문제적 천재”
밀러는 1985년 진보적 부유층 거주지인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에서 태어났다. 모계 쪽은 러시아제국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1903년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는 부동산 임대업을 하는 부모 밑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부모는 지역 사회에서 존경받는 민주당원이었고 그가 다닌 고등학교는 다문화와 다양성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밀러는 16세 때 지역 웹사이트에 기고한 글에서 라틴계 학생들에 대해 경멸을 드러냈다. 그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기초 영어도 부족한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학교 전반에는 라틴계가 많은데, 정작 우등반에는 거의 없다”고 했다. 9·11 테러 발생 2년 뒤인 2003년 작성한 해당 글에서 “(이 학교는) 오사마 빈라덴에게도 환영받을 만한 곳”이라고도 비난했다.
5월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밀러. 워싱턴=AP 뉴시스밀러는 디애틀랜틱 인터뷰에서 자신이 어릴 때부터 ‘비순응적 성향’을 가진 아이였다고 밝혔다. 고등학교 학생회에 출마했을 때는 연설에서 “쓰레기 치우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들었다. 그 일 하라고 돈 받는 청소부들이 있는데 왜 내가 치워야 하냐”고 외치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시사지 디애틀랜틱은 밀러가 진보 성향의 동급생을 화나게 만들려고 일부러 이같이 발언했다고 봤다. 프랑스24는 밀러를 두고 “문제적 천재”라고 평했다. 그는 학창시절 우파 라디오 진행자 래리 앨더의 방송에 70차례 이상 출연하기도 했다.
듀크대 시절에는 극우 사상가 데이비드 호로위츠와 협업해 캠퍼스 내 반이슬람 운동을 주도했다. ‘백인 정체성’을 강조하며 ‘대안우파(alt-right)’라는 용어를 퍼뜨린 백인우월주의자 리처드 스펜서와도 연을 맺었다. 듀크대 라크로스팀 성폭행 사건 때는 백인 남학생을 옹호하며 전국 보수 언론에 등장했다. 사건이 무혐의로 결론 나자 그는 이 시건을 ‘백인에 대한 박해’라고 주장했다.
● 트럼프의 트롤
그는 졸업 후 워싱턴으로 가 티파티 소속 미네소타 공화당 하원의원 미셸 백만의 공보비서로 일했다. 이후 극우 성향의 앨라배마 상원의원이었던 제프 세션스 밑으로 옮겼다. 세션스는 이후 트럼프 1기 행정부의 초대 법무장관이 됐다.
세션스 의원실 근무 당시 밀러는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 전략가가 이끌던 매체 ‘브레이트바트 뉴스’와 연을 맺었다. 브레이브바트 뉴스 소속 기자들을 끈질기게 설득해 미등록 이민자들에게 합법화 경로를 열어주려 했던 초당적 이민법안에 대한 반대 여론전을 펼쳤다. 결국 법안은 2013년 좌초됐고 밀러는 극단적 반이민 정책을 옹호하는 인물로 워싱턴 정계에 각인됐다.
2015년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멕시코인은 마약상, 범죄자, 강간범”이라고 연설하자 밀러는 세션스 의원실에 휴직계를 내고 트럼프 캠프에 합류했다. 배넌의 추천으로 이민 문제 담당과 연설문 작성자로 임명됐다. 이후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7개 이슬람 국가 출신자 입국 금지 및 남부 국경에서 부모와 자녀의 격리 수용 등 악명 높은 정책들을 주도했다.
디애틀랜틱은 밀러를 ‘트럼프의 오른팔 역할을 하는 트롤’이라고 표현했다. 도발적 논쟁 그 자체를 추구하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토론을 통해 상대를 설득하려는 의도가 없고, 논쟁으로 인한 혼란 자체를 정치적 승리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이다. 도발의 취지는 상대를 자극하고 상대의 위선을 드러내는 것이다. 밀러는 “깨달음을 위한 건설적 논쟁을 지향한다”고 했다.
● ‘유배기’에 곁을 지키다
밀러는 2020년 대선 패배와 2021년 1월 6일 의사당 난입사건 이후에도 트럼프 대통령의 곁을 지켰다. 그러면서 워싱턴 로비스트나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대신 ‘아메리카 퍼스트 법률재단(AFL)’이라는 비영리단체를 설립했다. 그는 “좌파의 법적 공격에 맞서야 한다”며 수십 건의 소송에 앞장섰다. 2022년에는 반유대주의를 이유로 대학에 대한 연방 지원 중단을 요구했다. 지난해에는 불법체류자와 결혼한 미국인의 추방 유예 정책을 문제 삼아 승소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아메리카 퍼스트 법률재단은 지난해 기준 변호사 20여 명, 누적 모금액 6000만 달러 규모의 조직으로 성장했다. 밀러가 지난해 단체에서 받아간 임금도 50만 달러가 넘었다.
3월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밀러. 워싱턴=AP 뉴시스그는 트럼프 1기 때 좌절된 정책들의 실행 전략을 연구하는 데도 몰두했다. 법조인 출신이 아니지만 오래된 법률을 새롭게 활용할 방안을 제시했다. 전시법인 ‘외국인 적국자 법(Alien Enemies Act)’을 이민자 추방에 활용하자고 그가 처음 제안했다고 한다.
● 화려한 백악관 복귀
결실은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에 복귀한 후 쏟아진 행정명령을 통해 드러났다. 밀러는 언론과 법원이 대응하지 못하도록 ‘전선을 범람(flood the zone)’시키는 전략을 사용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모든 행정명령을 직접 작성하거나 수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상의 국토안보보좌관 역할을 수행하고 대학과 로펌, 박물관 압박 정책도 지휘하고 있다. 부처 장관을 거치지 않고 연방정부 관료들과 직접 소통한다고 한다.
아메리카 퍼스트 법률재단 인맥도 요직에 대거 기용되며 밀러의 입지를 강화했다. 러셀 보트 백악관 예산국장, 리드 루빈스타인 국무부 법률고문, 맷 휘태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미국 대사 등이 대표적이다. 국무부 부장관에는 측근인 크리스토퍼 랜다우 전 주멕시코 대사를 앉혀 이민 단속 문제에 대한 국무부 협조를 끌어내고 있다.
왼쪽부터 밀러, 수지 와일스 백악관 비서실장,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16일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중 열린 트럼프 대통령과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의 정상회담에 배석했다. 카나나스키스=AP 뉴시스사법부에 대한 도전도 서슴지 않는다. WSJ은 “밀러는 법적 한계를 우회하려는 집착이 강하다”고 전했다. 올 3월 한 연방법원이 트럼프 행정부에 불법 체류자를 태우고 엘살바도르로 향하던 추방 항공기를 돌리라고 명령하자 긴급 회의가 소집됐다. 일부는 법원 명령을 거부하면 위법 소지가 있다고 우려했지만, 밀러는 항공기를 계속 운항하라고 주장했고 결국 밀러의 뜻대로 됐다. 판사는 트럼프 행정부의 추방 강행을 두고 “헌법을 조롱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과격한 조치도 밀어붙인다. 로스앤젤레스 시위는 밀러가 단속당국에 체포 속도를 높이고, 체포 대상을 확대하라고 압박한 뒤 발생했다. 밀러는 폭스뉴스에 출연해 하루 체포 목표를 세 배로 늘려 3000건으로 설정했다고 밝혔다. WSJ에 따르면 밀러는 전국의 이민세관단속국(ICE) 간부를 워싱턴으로 불러 단기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이는 건축 자재점 ‘홈디포’와 편의점 ‘세븐일레븐’을 표적으로 대대적 체포를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스앤젤레스의 홈디포와 상점가에서 불법 체류자들이 대거 체포됐고 이에 반발해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밀러는 즉각 이들이 “반란을 벌이고 있다”고 규정했다. 또 “내가 태어난 도시의 상당 부분이 이제는 실패한 제3세계 국가처럼 보인다. 찢기고 발칸화된, 낯선 이들로 이뤄진 사회가 됐다”며 비난했다.
이를 두고 루트 베르메호 카사도 스페인 레이후안카를로스대 정치학과 교수는 “그간은 국경 통제와 불법 이민자 만을 문제 삼았지만, 이제는 ‘그들은 우리와 다르다, 문화적으로 통합되지 않는다’는 정체성 담론에 불이 붙었다. 밀러가 그 흐름을 주도했다”고 프랑스24에 말했다.
● “제2의 딕 체니”
공화당이 상원 통과를 시도 중인 트럼프 대통령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에는 ICE 요원 1만 명 충원, 10만 명 수용 규모의 시설 신축 등 1500억 달러 규모의 예산이 포함되어 있다. 법안이 통과된다면 밀러의 꿈은 현실이 될 수 있다.
밀러(왼쪽 두번째)와 피터 나바로 백악관 선임고문(맨 오른쪽)이 올 2월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열린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 서명식에 참석했다. 워싱턴=AP 뉴시스한 트럼프 대통령의 참모는 NBC방송에 “밀러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외교정책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딕 체니 전 부통령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백악관 인사”라고 했다. 밀러는 백악관에서 오벌오피스(대통령 집무실)와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집무실을 둔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의 말을 통해서도 밀러의 위상은 잘 드러난다. 마이크 왈츠 전 국가안보보좌관의 경질 직후 가진 NBC 인터뷰에서 진행자가 밀러를 국가안보보좌관 후보로 언급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그건 일종의 좌천 인사(downgrade)다. 스티븐은 지금 훨씬 많은 권한을 갖고 있다.”
29화 요약: 트럼프식 이민 정책의 설계자로 꼽히는 스티븐 밀러는 트럼프 2기의 주요 정책을 직접 설계하고 지휘하는 핵심 실세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의 지위가 국가안보보좌관보다 높다고 했고, 부처 장관보다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청소년기부터 이민자와 진보 사상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그는 정책 집행 과정에서 충돌과 갈등을 오히려 반기는 스타일이다.
동아일보가 아카이빙한 미니 히어로콘텐츠 ‘트럼프 2.0 폴리시 맵’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주요 정책을 한 눈에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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