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 독재 아닌 다수의 ‘날 것’[송평인의 시사서평]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6월 29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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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2018년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은 국내 언론에서 자주 인용되는 책 중 하나다. 특히 민주주의는 종이에 써진 규범의 준수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고 정당 간의 ‘상호 관용(mutual tolerance)’와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가 필요하다는 대목이 그렇다.

두 사람은 2023년에는 ‘소수의 독재(Tyranny of the Minority)’라는 책도 냈다. 우리나라에는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번역된 제목에는 동의할 수 없다. 소수(the Minority)는 다수(the Majority)와 대(對)를 이루는 소수를 의미할 뿐 ’극단적‘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 오해를 부르는 잘못된 번역이다.

본래 Majority는 과반을 의미하고 Minority는 전체에서 과반을 뺀 나머지를 의미한다. 민주주의를 다수의 지배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과반의 지배다. 50%만 넘으면 51%이든 99%이든 다 과반이고 50% 미만이면 49%이든 1%이든 다 Minority다. 그것이 Minority 본래의 의미다. Minority란 말 속에는 ‘극단적’이란 뜻도 없고 ‘극소수’란 뜻도 없다.


저자들은 2016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를 이기긴 했지만 그것은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 수에서 앞선 것일 뿐 전국 득표수에서는 오히려 300만표 가까이 힐러리에게 밀렸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또 대선과 동시에 직접 보통 선거로 치뤄진 하원 선거에서는 공화당이 2016년과 2018년 중간 선거에서 모두 민주당에게 뒤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상원도 민주당 우위였다. 다시 말해 첫 임기동안 트럼프와 공화당은 한번도 다수인 적이 없는 소수였으며 소수의 지배이기 때문에 그것이 독재라는 것이다.

●소수의 지배라는 프레임 맞지 않아

그러나 2024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다시 승리하면서 이 책은 핵심 주제에 대해 유효성을 잃었다. 트럼프는 선거인단 수에서만 민주당 카멀라 해리스 후보를 앞섰을 뿐만 아니라 전국 득표수에서도 약 230만표 가량 앞섰다. 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에 앞섰다. 상원까지도 공화당이 우위로 돌아섰다.

저자들은 미국의 선거인단 제도와 상원 선출 방식을 문제 삼았다. 선거인단 표 538표 중 20표 가량이 공화당 후보에 유리한 시골 지역에 편향돼 있어 민주당 후보가 선거인단 선거에서 이기려면 득표수에서 약 4% 격차로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또 상원은 인구가 많은 주든, 적은 주든 상관없이 주별로 2명씩 뽑는데 이것도 공화당에 유리해 민주당이 상원을 장악하려면 득표수에서 약 5% 격차로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일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고 2024년 하원 의원 선거에서도 이긴 공화당과 그 후보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소수의 독재’는 2020년 대선에서 진 트럼프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추종자들의 의사당 점거 폭동을 선동까지 하는 것을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것’으로 본 저자들에 의해 쓰여졌다. 그러나 그런 대통령이 4년 뒤 첫 임기 때보다 더 큰 지지를 얻어 저자들의 엄격한 기준에 따르더라도 다수의 지배를 이뤄냈다. 트럼프의 두 번째 임기는 ‘소수의 독재’가 아니라 반(反)민주주의자가 다수의 지지를 얻어 하는 지배가 문제가 된 상황이다.

다수의 지지를 얻은 반민주주의자라는 표현은 ‘둥근 네모’처럼 형용 모순이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인데 어떻게 다수의 지지를 얻은 사람이 반민주주의자일 수 있을까. 저자들은 반민주주의자의 특징으로 두 가지를 꼽는다. 첫째 선거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것.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으로서 선거 패배 인정을 거부했다. 둘째 폭력을 분명히 거부하지 않는 것. 트럼프는 2021년 1월 6일 아침 추종자들에게 의사당으로 행진해 선거인단 투표에 대한 승인을 가로막으라고 촉구하고, 폭동을 막기 위한 주 방위군 파견 요청에 대한 승인을 3시간 넘게 거부하고, 폭동이 저지된 후에는 추종자들에게 ‘오늘을 기억하라’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2021년 1월 6일 미국 워싱턴 D.C.의 의사당 건물 밖에 모여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의 선거 승리에 대해 의원들이 승인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친트럼프 폭도들이 미국 의사당을 습격했다. ⓒGettyImages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2021년 1월 6일 미국 워싱턴 D.C.의 의사당 건물 밖에 모여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의 선거 승리에 대해 의원들이 승인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친트럼프 폭도들이 미국 의사당을 습격했다. ⓒGettyImages
AP 뉴시스
공화당은 이런 지도자와의 관계를 끊지도 않았다. 우리식 개념으로는 내란 선동을 한 트럼프의 탄핵소추에 찬성한 공화당 하원 의원은 220명 중 고작 10명에 불과했다. 상원에서는 탄핵 기준인 3분의 2 이상(67표)에 10표가 모자라 탄핵은 기각됐다. 공화당 상원 의원은 53명이었지만 탄핵에 찬성하는 의원은 7명에 불과했다.

저자들의 정의에 따르면 선거 패배도 인정하지 않고 폭력도 분명히 거부하지 않은 지도자와 정당이 4년 뒤 대통령 상원 하원을 동시에 장악하는 경악할 만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저자들의 주장처럼 ‘소수의 독재’라는 문제의식으로 다룰 수 없는 현상이다. 오히려 그런 문제의식의 바닥에 깔린 민주주의 인식 자체에 대한 재검토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우리에게는 민주주의의 모범 국가였던 미국에서 신임 대통령과의 ‘밀월 100일’도 정당 간의 초당파적 협력도 사라진 지 오래다. 민주당 빌 클린턴 대통령이 집권했을 때 공화당은 더 이상 밀월 기간을 보장하지 않았다. 민주당도 공화당 조지 부시 대통령이 취임하자 같은 식으로 대응하고 초당파적 협력도 거부했다. 공화당은 민주당 버락 오마바 대통령의 두 차례 임기 동안 상원에서 필리버스터를 무려 385회나 발동했다. 민주당도 연방법관 임명 동의에는 필리버스터를 원천 배제하는 식의 규범 파괴로 대응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에너지법안 등이 통과되지 않자 행정명령으로 대체했고 이에 상원 공화당 대표인 미치 맥코넬은 각 주에 오바마의 온실가스 배출 규제를 거부할 것으로 촉구하면서 대립했다.

이 같은 미국 정치의 퇴화가 저자들이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쓰고 정당 간의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강조한 이유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미국 정치의 퇴화의 원인이라기보다는 미국 정치의 퇴화 속에서 정치에 진입한 아웃사이더(outsider)로 볼 수 있다. 트럼프식 정치, 그것을 반민주주의라고 부르든 뭐로 부르든 그것이 미국인 다수의 지지를 얻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아직은 트럼프식 정치의 성공 여부를 알 수 없다. 요란한 소리만 내다가 끝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트럼프식 정치가 민주주의적 인사이더(insider)들이 풀지 못한 미국의 국내적 국외적 문제(그것은 세계적 문제이기도 하다)까지 푼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 다수의 ‘문제적’ 지배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저자들의 두 책에서 흥미로우면서 여전히 유효성을 잃지 않는 부분은 다른 데 있다. 미국 정치의 ‘날 것’을 근래만이 아니라 건국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여주고, 또 연방 차원만이 아니라 주(州) 차원까지 내려가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건국 초만 하더라도 미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서로를 라이벌로 보기보다는 제거해야 할 적으로 봤다. 연방주의자(Federalist)인 존 애덤스에서 공화주의자(Republican)인 토머스 제퍼슨으로의 권력 이양기에 일촉즉발의 무력 충돌 위기가 있었다. 남북전쟁 이후 재건 시기 노스캐롤라이나 월밍턴에서는 흑인들의 투표를 방해하고 흑인을 공직에서 제거하기 위한 유혈 쿠데타까지 발생했다. 이런 폭거들을 연방 정부가 묵인함으로써 남부에서 백인 독재가 70년에서 길게는 100년까지 지속됐고 이것이 역설적으로 1965년 민권 운동이 발생하기까지 미국 정치의 안정에 기여했다. 1990년대부터 다시 심화하는 정치 갈등은 인종 구성의 변화로 백인 대중과 일부 비(非)백인 엘리트 중심의 공화당과 일부 백인 엘리트와 비백인 대중 중심의 민주당 간의 풀기 어려운 대립에서 빚어지고 있다.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는 그것을 통해 민주주의가 이뤄지는 수단이라기보다는 현실에서의 힘의 균형이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라는 민주주의적 결과를 빚어낸다고 볼 수 있다. 방안의 탁상머리가 아니라 거리에서 ‘날 것’들이 대립하고 충돌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개념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거친 현실이 눈에 들어온다.

#민주주의#소수#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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