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칼럼]미래 세대를 위해 아픔을 견디자고 말하는 후보는 없는가?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5월 20일 23시 15분


‘성역 없는 개혁’ 외쳐 日총리 된 고이즈미
원조쌀 백 섬 팔아 학교 세웠던 정신 강조
청년 실업-노인 빈곤 등에 개혁 절실한 韓
뒤따르는 고통도 말해야 용기있는 지도자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개혁을 추진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쌀 백 섬의 정신’ 아닐까요?”

2001년 일본 총리에 취임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가 발표한 ‘소신 표명 연설’의 일부분이다. 소신 표명 연설은 일본 총리가 국회에서 향후 정책 방향 및 국정 현안에 의견을 밝히는 것을 말한다.

그가 차기 총리가 될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에 후보로 나섰을 때만 해도 그의 당선을 예측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의 유세에 구름처럼 사람이 몰렸다. 당시 자민당은 10년에 걸친 불황으로 인기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에 당의 인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스타 정치인이 절실했다. 고이즈미는 거침없고 유쾌한 언변으로 “성역 없는 개혁”을 외쳤고, 잃어버린 10년에 지친 유권자들은 그에게 희망을 걸기 시작했다. 결국 초반의 예상을 뒤엎고 고이즈미가 자민당 총재에 당선됐고, 얼마 뒤 총리에 취임했다. 새 총리의 소신 표명 연설은 큰 화제를 모았다. 거기서 나온 말들이 연말 유행어 대상에 여럿 선정됐는데 ‘쌀 백 섬’도 그중 하나다.

18일 밤 6·3 대선에 나선 후보들의 첫 TV토론을 보면서 ‘쌀 백 섬’이 떠올랐다. ‘쌀 백 섬’은 후세를 위해 현재의 고통을 감내한 일본 어느 지역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지난 10여 년간 일본 기업의 실적이 꾸준히 개선됐고 덕분에 지금은 고용에 활기가 넘친다. 일본 경제는 여전히 불안하고 일본 사회와 기업의 개혁은 지금도 진행 중이지만 의미 있는 첫발을 내디딘 것이 고이즈미의 개혁이었다.

고이즈미는 일본에서 가장 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청년실업률이 가장 높던 시기에 총리에 올랐다. 그런 상황에서 고질병이던 부실채권 문제를 해결했고, 연금개혁을 성공시켰고, 젊은 정치인을 대거 국회에 입성시켰으며, 버블 붕괴 후 처음으로 재정을 안정시켰다. 그가 추구한 정책 모두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이즈미는 그 당시 일본에 꼭 필요한 지도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달콤한 약속으로 유권자를 현혹하려 하지 않고, 고통을 견디며 미래를 위한 개혁을 이루자고 호소하는 용기를 가진 지도자였다.

19세기 중반 일본에는 크고 작은 내전이 여럿 있었다. 지금의 니가타현에 전쟁에서 패해 재정이 매우 궁핍했던 번(番)이 하나 있었다. 일반 평민보다 신분이 높았던 무사들조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때 외부로부터 쌀 백 섬의 원조가 들어왔다. 그런데 번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던 대참사(지금의 부지사에 해당)가 그 쌀을 매각해 학교를 설립하겠다고 선언한다. 분노한 무사들이 몰려가 항의하자 대참사는 이 쌀을 지금 먹으면 금세 없어지지만 교육에 쓰면 미래에는 백만 섬이 된다고 설득하며 자신의 정책을 밀어붙였다. 미래 세대를 위해 고통을 감내한 선조의 얘기가 개혁을 주저하던 일본인들에게 감동을 줬다.

지금 한국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다.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이 높고, 국민연금도 여전히 불안하다. 전 연령의 고용률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낮은 편이고 일자리를 찾지 못한 청년들이 졸업을 마냥 미루고 있다. 정년은 60세인데 연금은 65세가 돼야 받을 수 있다. 청년들은 연금도 불만이고 정년 연장에도 불안해 한다.

그러니 변화가 필요하다. 고용을 늘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나랏돈으로 하루에 몇 시간 의미 없는 일에 부리고 마는 정책이 아니라 ‘내게도 먹고살 수 있는 일자리가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일자리가 필요하다. 정년 연장은 필요하지만, 정년이 된 정규직을 계약직으로 전환하고 임금을 대폭 삭감하는 등의 장치를 통해 청년 고용에 끼칠 수 있는 악영향을 최소화해야 한다. 노동 강도를 줄이면서 임금 상승을 억제하는 대신, 부족해진 노동량을 채우기 위해 더 많은 인원을 고용하는 방안도 진지하게 생각할 때다. 이 외에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이뤄야 하는 많은 변화가 일정 부분의 고통을 요구한다.

그런데 정년 연장은 하겠다면서, 혜택을 보는 이들이 감수해야 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주 4.5일로 노동시간을 줄이겠다면서 “임금은 그대로다” 약속한다. 이대로면 일자리 증가는 요원하다. 모든 개혁에는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 뒤따른다. 그 고통을 솔직히 인정하고, 함께 견뎌 나가자고, 자녀 세대를 위해 더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어 보자고 외치는 용기 있는 후보는 없는가? 남은 두 번의 TV토론에서도 그런 후보가 있는지 간절한 마음으로 지켜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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