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진명여고 학생 태운 전차… 경복궁 급커브 돌다 100여명 다쳐
‘이윤 우선 경영’이 원인으로 지목
운전 미숙, 만원 승객, 낡은 차량…
사고 뒤에도 위자료 줄이려 급급… 30년대 인구 급증에도 임시방편만
경복궁 서쪽 모퉁이를 돌다 탈선해 전복된 ‘광화문선’ 전차와 피해 학생들의 모습을 보도한 1929년 4월 23일 매일신보.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전차 운영 독점한 경성전기회사
1929년 4월 22일, 화창한 봄날이었다. 이날은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의 개교 23주년 기념일. 기념행사를 마친 학생들은 청량리 영휘원(永徽園)에 참배를 가기 위해 전차 세 대에 나눠 탔다. 영휘원은 진명여고의 설립자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의 능이었기 때문이다. 간만의 나들이에 즐거워하던 여학생들의 재잘거림도 잠시, 일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경복궁 서쪽 모퉁이를 돌던 전차가 탈선해 전복된 것이다. 사고 직후 확인된 바에 따르면, 약 120명의 학생 중 100여 명이 중경상을 입은, 실로 대형 참사였다.(동아일보, 1929년 4월 23일)》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커브를 돌며 속도를 줄이지 않은 운전사의 과실로 판명됐다. 사고가 난 노선은 이른바 ‘광화문선’으로, 현재 서울 종로구 효자동 부근에서 출발해 경복궁 앞을 지나 광화문통(현 세종대로)을 따라 내려와 ‘종로선’과 연결되는 노선이다. 당시 진명여고는 효자동 다음 정류장인 창성동에 위치해 있었다. 광화문선에는 궁궐 서쪽 모퉁이를 급하게 도는 구간이 있어 특별한 주의가 요구됐다. 그러나 미숙한 초보 운전사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진입했던 것이다. 결국 1929년 10월, 운전사 석갑동은 금고 6개월의 형을 최종 선고받으며 형사적 조치는 마무리됐다.(매일신보, 1929년 10월 1일)
1929년 기준 전차 노선이 표시된 경성시가전도로, 동그라미를 친 부분이 사고 지점이다. 사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여론은 사고 직후부터 전차의 운영 주체인 경성전기회사를 겨냥했다. 동아일보는 “전차 전복 사고의 원인이 운전사에게 있다고 하며 회사로서는 큰 책임이 없다고 극구 변명하나” “회사에서는 많은 이익을 얻으면서도 경비 절약에 급급하여 노련한 운전사는 약간의 퇴직금을 주어 정리하여 보내고 급료가 저렴한 젊은 운전사만 사용하기 때문에 경험조차 부족하고 기술이 없을뿐더러 젊은 관계로 직무에 충실치 못한 여러 가지 원인을 지으면서도 시간은 채우느라고 운전대에 올라서게 되는 것이”라고 질타했다.(동아일보, 1929년 4월 25일) 매일신보도 “전복 원인이 운전사의 과실에 있더라도 궤도의 불완에 있든지 승차 인원의 초과에 있든지 하여간 그 전 책임의 귀속은 경전(京電)에 있다 말할 것”이라고 했다.(매일신보, 1929년 4월 28일)
이 같은 여론의 배경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쌓여온 시민들의 불만이 있었다.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21년부터 “시중에는 운전하는 전차의 대수가 부족한 까닭에 항상 교통이 복잡하고 따라서 전차 사고가 자주 발생한다는 원인을 발견한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에서 실지 조사를 하는 중”인데 “금년에는 사고가 더욱 증가하고 가을부터 지나간 달 사이에는 사고의 수효도 많이 있었을 뿐 아니라 참혹히 사망한 사람도 적지 아니하여 그와 같은 잠시의 횡액으로 중상한 사람은 병신이 되고 더욱 가이 없는 것은 생명까지 잃는 사람인데 그 사고로 말하면 부상을 한 사람 자신의 과실도 있겠지마는 요사이 같이 전차의 운전 계통이 불완전하고 차대가 부족하여서는 중대한 원인이 회사에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 터”라는 지적이 보인다.(동아일보, 1921년 12월 11일)
비싼 요금, 그에 비해 낡고 부족한 차량, 궤도 정비 불량, 만원 승객, 운전 미숙…. 당시 신문에는 경성 전차 운영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가 끊임없이 실렸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이런 문제는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 1929년의 대형 참사는 결코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던 셈이다.
경성 전차 사업을 독점한 경성전기회사. 현재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6번 출구 앞에 있는 건물로, 한국전력공사 서울본부 사옥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경성의 전차 운행은 1899년 한성전기회사가 서대문과 동대문을 잇는 종로선을 개설하며 시작됐다. 1907년, 전차 사업권이 일본 자본가들이 출자한 경성전기회사에 넘어가면서 경성의 전차 운영은 독점 체제로 변했다. 이후 경성전기는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도심부와 마포, 용산, 남촌 등을 잇는 노선을 가설했다. 1920년대 들어 총독부를 비롯한 주요 관청과 기구가 북부로 이전하면서 경복궁과 북촌 일대에도 노선을 신설했고, 사고가 난 광화문선도 그중 하나였다.
일제강점기 전차는 대중교통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8·15 광복 직전의 통계를 보면 경성 인구 100만 명 가운데 하루 평균 50만 명 정도가 전차를 이용했을 정도다. 그런데 경성전기의 경영 방침은 철저하게 ‘이윤 우선주의’ ‘주주 우선주의’였다. 일례로 많은 회사가 무배당, 결손 운영을 하던 1920년대 후반 불황기에도 경성전기는 주주들에 대해 10% 안팎의 배당을 유지했다. 고배당이 가능했던 첫째 이유는 독점 사업으로 일정한 수익이 항상 보장돼 있는 점이었지만, 두말할 나위 없이 인건비 등 비용 절감과 인색한 투자 등을 들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여러 문제와 시민들의 불만을 키우는 원인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성전기의 경영 방침은 바뀌지 않았다. 대주주인 경영진 대부분이 일본 본토에 기반을 둔 자본가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경성 전차 사업의 경쟁자가 있는 것도 아니라 시중의 나쁜 여론이 그들의 다른 사업에 영향을 미칠 수도 없었다.
1929년 사고 이후에도 후유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교통사고의 특성상 퇴원 후 재입원하거나 뒤늦게 증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또 피해자가 어린 여학생들이라 정신적 후유증을 호소하는 사례도 많았다. 그런데 경성전기의 대응 역시 도마에 올랐다.
“무책임하고도 온당치 못한 행동을 감행하여 학교 당국과 일반 부형들의 감정을 일층 상하게 한 일”이 자꾸 일어났다. “우리(경성전기)는 세브란스병원과 의전(醫專·경성의학전문학교)병원을 지정하였은 즉 그외의 의원에 입원한 사람은 절대로 치료비를 물 수가 없다고” 하거나 “병원의 허가도 없이 입원실로 뛰어들어가 마치 형사가 심문하는 모양으로 입원한 학생들의 성명을 물어 수첩에 적”고 “때마침 동무들이 와서 이야기하며 놀던 중인데 그들은 너희들은 무엇하러 왔느냐 또는 앓는 사람이 어찌 머리를 빗고 있느냐 또는 아프다는 사람이 어찌 그와 같이 이야기하며 놀고 있느냐고 힐난”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29년 6월 24일) “모모 병원으로 찾아다니면서 ‘입원을 할 만한 사람만 입원을 시켜라’ ‘할 수 있는대로 경(輕)하게 하여 달라’는 등 은근한 운동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동아일보, 1929년 6월 28일)
세간에서는 경성전기가 비인도적이라는 비난에도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 진명여고 학부형회가 제기한 위자료 소송을 의식한 것이라고 봤다. 1년 이상 재판이 이어진 가운데 위자료 액수를 낮추려는 경성전기의 압박은 지속됐다. 결국 1930년 9월 경성전기는 학부형회 요구액 15만 원의 10분의 1 수준인 1만6000원을 피해자의 부상 정도에 따라 지급하는 것으로 최종 판결이 확정됐다.(매일신보, 1930년 9월 7일)
경성전기의 이 같은 경영 태도에 대한 세간의 불만은 점차 고조돼, 1930년대 초에는 ‘전기 공영화 운동’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운동은 실패했고, 전차 독점 운영은 계속됐다. 1930년대 후반 경성 인구가 폭증하며 교통난도 극심해졌다. 1939년 경성전기는 출퇴근 러시아워에는 전차 정류장 119개 중 76개에만 서는 ‘급행전차’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1942년에는 29개 정류장에만 서는 ‘급급행전차’까지 운행했다. 더불어 좌석을 뜯어내 승차 정원을 늘리기도 했다. 그런데 차량 증차 등 고정 비용 투자가 필요한 조치는 끝내 시행하지 않았다. 결국 이윤을 제일의 기준으로 한 경성전기의 전차 사업은 최악의 교통난과 교통사고의 위험만을 유산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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