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으로 본 조선 미술시장
조선 산수화 ‘압구정’ 한적한 풍경… 현 ‘집값 풍향계’ 아파트촌과 대비
정선은 18세기 조선의 스타 작가… ‘금강첩’은 당대 기와집값 3분의 2
대필-필법 등 상업화 의혹 있지만… 80대에도 촛불켜고 정교함 이어가
겸재 정선의 화첩 ‘경교명승첩’(1741∼1759)에 수록된 ‘압구정’. 현 영동대교에서 바라본 압구정동의 모습을 묘사했다. 가운데 언덕 위 기와집은 조선 세력가 한명회가 권세를 잃은 뒤 살던 집 ‘압구정’이다. 간송문화미술재단 제공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200년 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모습입니다. 요즘은 고층 아파트들이 숲을 이루고 있지요.” 기획자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관객들 사이에 웃음과 탄성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지금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겸재 정선’의 한 장면이다. 조선시대 산수화 한 점을 보면서 이렇게 관객들이 즐거워하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정선 ‘압구정’의 현재 모습. 그림처럼 한강 바로 건너 남산이 보인다. 양정무 교수 제공오늘날 압구정동은 한국식 자본주의의 상징 같은 곳으로, 늘 국민적 관심을 받아 왔다. 이곳 아파트의 거래가는 부동산 시장의 풍향계가 되고, 압구정 로데오거리는 ‘한국의 유행 1번지’라는 말로 대표될 만큼 1990년대 패션과 소비 문화의 실험장이었다. 그런데 조선의 대표 화가 겸재 정선이 300년 전 그린 압구정의 풍경은 너무나 소박하고 평화롭기만 하다. 초가집 사이로 기와집이 간간이 보일 뿐, 전형적인 시골 마을의 모습으로 오늘날과는 전혀 달라 보인다.
정선의 그림 한가운데 약간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한 집이 바로 조선 전기의 세력가 한명회의 집이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덕분에 영의정 자리까지 오르며, 두 딸을 각각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보내는 등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말년에는 권세를 잃고 지금의 압구정동에 집을 지어 살다 생을 마감했다.
겸재 정선 ‘압구정’의 모델이 된 한명회의 집 ‘압구정’ 현재 위치. 서울 강남구 압구정 현대아파트 71동과 72동 사이로 알려져 있다.중앙 정치에서 밀려난 한명회가 지은 집의 당호(堂號)가 ‘압구정’으로, 오늘날 이 지역 이름의 기원이 된다. 참고로 압구정은 한명회의 호인 ‘압구(狎鷗)’에서 따온 것이다. 압구는 ‘갈매기와 친해 가까이 지낸다’라는 뜻이다. 갈매기는 의심이 많은 새로 알려졌는데, 그런 갈매기와도 벗할 만큼 자연에 묻혀 조용히 지내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정선이 그린 당시 압구정의 풍경은 말 그대로 지극히 한적하고 평화롭기만 하다.
‘겸재 정선’ 전은 조선시대 명승지와 압구정 같은 당시 한양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무엇보다 출품된 작품 수가 165점에 이르러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20세기 이전에 이렇게 풍부한 작품 세계를 보여준 우리 화가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선에 대해 새롭게 눈뜨는 계기가 된다.
그러면서 그가 어떻게 이토록 많은 작품을 쏟아냈을까에 대한 궁금증도 생긴다. 다행히 그의 생애와 그림에 대한 상업적 기록이 일부 전해져 그의 작가적 삶을 어느 정도 추적해 볼 수 있다.
정선이 50대부터 83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거주한 ‘인곡유거’. 오른쪽 아래 도포 입은 선비(점 선 안)가 겸재의 자화상으로, 평생 문인이고 싶던 그의 바람이 표현됐다. 간송문화미술재단 제공정선은 1676년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현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몰락한 사대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소년가장으로 집안을 돌보며 성장했다. 이후 당시 중인들의 직업으로 여겨지던 화가의 길을 선택해 1759년 8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정선은 생전에 엄청난 명성과 부를 누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세기 한국에 미술 시장이 있었다면, 오늘날 기준으로 ‘스타 작가’ 또는 ‘블루칩 작가’라고 불릴 만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그림에 대한 수요는 “삼대밭처럼 무수하여” 쉴 새 없이 작업해야 했는데, 그가 쓰고 난 붓을 모으면 “무덤을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아마도 그에게 성공의 계기는 36세 때 금강산을 직접 답사한 뒤 내놓은 금강산 시리즈였을 것이다. 신선들이 산다는 금강산은 누구나 가보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 쉽게 갈 수 없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 명산의 구석구석을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 보여준 그의 그림은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사로잡았을 것이다.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의 가격도 상당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신돈복이 쓴 ‘학산한언’에 따르면, “우리 동네의 한 집이 일찍이 정선의 금강첩(金剛帖)을 사천 이공댁으로부터 사들였는데, 엽전 30냥과 좋은 말 한 필을 주었으니 값이 40냥가량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고 전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정선이 금강산을 그린 화첩은 40냥 정도에 거래됐다. 당시 조선시대 왕족과 권문세가들의 주거지로 명성이 높았던 북촌의 기와집 한 채 가격이 60냥 정도였으니, 이는 상당히 고가라고 할 수 있다. 1733년에도 그의 다른 화첩이 비슷한 가격에 거래된 예가 전해 오는 것을 보면, 이 정도가 18세기 정선 화첩의 기준가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금강전도’나 ‘인왕제색도’ 같은 대형 작품 역시 높은 가격에 거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정선의 그림은 중국에서도 인기가 높아, 은 100∼130냥 정도에 팔렸다는 기록이 전해 오고 있다. 이는 청나라 건륭제 시절 최고 궁정화가의 1년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요즘 기준으로 치면 억대를 호가했다고 볼 수 있다.
정선은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기 위해 다소 급히 그린 그림도 남겼다는 연구가 있다. 이렇게 상업적으로 양산된 그림에 대해 ‘수요에 답한 그림’이라는 뜻으로, ‘수응화(酬應畵)’라고 부르기도 했다. 동시대 기록에 따르면 정선이 과도한 주문을 감당하기 위해 붓을 빠르게 휘둘러 휙휙 그리는 휘쇄법(揮灑法)이라는 필법을 사용했고, 심지어 몸이 지칠 때는 아들에게 일부 그림을 대필시켰다는 이야기까지 전해 온다. 만약 이런 기록이 사실이라면, 정선이 활동하던 18세기에 이미 현대 미술 시장의 명암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번 전시에서 그런 흔적도 찾아보려 했다. 대충 그린 듯한 필획이나 휘날리는 필선을 짚어보려 했지만,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도리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수묵의 미묘한 농담과 필획의 치밀함에 감탄하게 됐다. 아마도 이번 전시에 출품된 정선의 작품들은 엄선된 것이라 그가 그렸을지도 모를 이른바 상업용 그림과는 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점 한 점 그의 세심함이 깃든 작품 세계를 눈앞에서 확인하다 보니, 휘쇄법이나 대필로 그가 대량 생산했다는 일각의 평가는 되레 정선의 상업적 성공을 시기한 이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따르면 정선은 80세가 넘어서도 두꺼운 안경을 쓰고 촛불 아래에서 털끝만큼의 실수도 없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번 호암미술관 전시를 통해 노화가의 집중력 넘치는 필획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어 가슴 벅찼다. 더불어 그의 그림을 구하기 위해 달아올랐던 조선시대 후기 미술 시장을 상상하면서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몇 번을 돌아봐도 지루할 틈이 없다. 전시는 6월 29일까지.
※참고 자료: 장진성. ‘정선의 그림 수요 대응 및 작화 방식’, 동악미술사학 11(2010년): 22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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