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 시프트, 영올드가 온다] 2부 〈3〉日 고령자 주택 ‘코코판’
지자체가 땅 지원, 대기업이 운영… 도심 원룸형 구조, 월세 상대적 저렴
“버스 타면 긴자 쇼핑거리가 코앞… 아들이 같이 살자고 했지만 거절”
영올드, 문화생활-세대 교류 원해… 日에 200개 넘는 ‘코코판 실버주택’
일본 도쿄의 중심지에 있는 고령자 주택 ‘코코판 가치도키’에서 입주자들이 인근 어린이집 원생들과 함께 교류의 시간을 갖고 있다. 사진 제공 갓켄
지난달 26일 찾은 일본 도쿄 주오구의 53층 고층 맨션(고층 아파트)인 ‘가치도키 더 타워’. 주오구는 긴자 쇼핑거리가 위치한 도쿄의 중심으로 땅값이 비싸기로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곳이다. 핵심 지역 ‘맨션’인 만큼 매매 가격도 비쌌다. 1층 부동산 표지판을 보니 전용면적 73㎡ 짜리(51층)가 2억4980만 엔(약 24억5000만 원)에 매물로 나와 있었다.
이 같은 고급 고층 아파트 2∼4층에는 다름 아닌 고령자 주택 ‘코코판 가치도키’가 차지하고 있다. 아파트를 지을 때 지방자치단체인 주오구의 소유 지분만큼을 시니어를 위한 주택 공간으로 마련한 것이다. 덕분에 이곳 입주자들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월세’에 주오구 맨션에 거주할 수 있다.
2017년 코코판 가치도키가 문을 열 때부터 9년째 살고 있다는 세지마 하쓰코 씨(92)는 도심 입지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녀는 “버스 타면 긴자 쇼핑거리도 코앞이라 고독감을 느낄 새가 없다”며 “교통이 편하니 딸도 일요일 저녁마다 찾아온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신부전증이 악화되기 전까지는 주 3회 요가를 배우기도 했다고 말했다.
세지마 씨는 30여 년 전 남편과 사별했다. 딸(60)과 아들(55)도 도쿄에 살고 있지만 독립 생활을 택했다. 그는 “아들이 같이 살자고 했지만 싫었다. 노후에 혼자서 느긋이 지내고 싶었다”며 웃었다.
세지마 씨가 거주하는 방을 찾았다. 거실을 겸하는 방 한 개와 욕실과 화장실이 있는 원룸형 구조였다. 눈에 띄는 것은 침대와 욕조, 변기 등 3곳에 긴급상 황 때 누를 수 있는 벨이 각각 설치돼 있다는 것. 그는 “혼자 살아도 이런 긴급 벨이 있으니 걱정이 덜하다”며 “안전한 곳에서 안심하고 살고 있으니 자녀들도 만족해한다”고 말했다. 이곳에는 현재 60세 이상 시니어 4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어떻게 도쿄 핵심지에 저렴한 노인 주택이 들어서는 게 가능했을까. 주오구 측이 건설지 땅 지분을 일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오구는 다른 지분 소유자들과 함께 고층 아파트를 지었고, 건물이 완성되자 땅 소유분만큼의 공간을 시니어 주택으로 만들기로 했다. 공모를 통해 운영 사업자로 일본 최대 교육·의료 복지 기업인 ‘갓켄(學研)’의 고령자 주택 브랜드인 ‘코코판’이 선택됐다.
지자체 지원 덕에 거주비는 주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 1인실(26.56㎡) 한 달 월세는 11만1200엔(약 110만 원). 24시간 상주하는 간병인이 목욕 등 생활을 돕고 야간에도 위급 상황을 살피는 생활지원서비스(월 3만8500엔)를 합해도 14만9800엔 정도(약 149만 원)다. 일본인의 연금 평균 수령 금액이 20만 엔 안팎인 것을 감안하면 평범한 연금 생활자도 거주할 수 있는 셈이다. 게다가 입주할 때 보증금은 집세 두 달분만 내면 된다.
도쿄 월세가 치솟고 있지만 2017년 문을 연 이후 9년째 동결돼 있는 점도 장점으로 꼽힌다. 고령자 주거법에 따라 임대료 상한선은 월 최고 24만 엔을 넘길 수 없다. 인근 주택 임대료보다 지나치게 많이 받아서는 안 된다는 조건도 있다. 코코판 가치도키 관계자는 “직접적으로 인건비와 연결되는 생활지원서비스 비용은 조금씩 오르고 있지만 아직 임대료는 올리지 않고 있다. 지자체의 지원을 받는 부분도 있다”고 설명했다.
● “시니어 시설 기피는 옛말”
‘코코판 가치도키’가 입주해 있는 맨션의 외경. 코코판 실버 주택 운영사 갓켄 기업은 1946년 창립 이후 원래 학습지 등을 주력으로 했던 교육 기업이었다. 하지만 저출산 고령화에 의료복지 사업에 뛰어들었다. 일본에 200개가 넘는 실버 주택을 운영하고 있다.
일본의 시니어 시설은 지역 사회나 세대 간 소통을 중심으로 진화하는 것이 특징이라는 게 갓켄 측의 설명이다. 일본의 베이비부머 ‘단카이 세대’(1947∼1949년 출생)를 비롯한 일본 영올드(Young Old·젊은 노인)는 일본 경제 성장의 주역으로 은퇴 이후에는 실버 산업을 이끄는 소비의 주체로도 꼽힌다. 젊은 시절처럼 다양한 문화를 누리면서도 다른 세대와 교류할 수 있는 입지나 시설을 원하기 때문이다.
코코판 가치도키에서도 아파트 전체 거주자들이 함께 훌라우프를 배우는 등 문화 프로그램을 열고, 인근 어린이집 원생들을 초청해 고령자와 교류하는 행사도 진행한다. 한번 방문한 어린이집 원생이 시설에서 만났던 고령자에게 이튿날 아침에 모닝콜을 해주는 등 친밀감을 높이기 위한 소소한 이벤트도 하고 있다.
요코하마에 있는 ‘코코판 요코하마 쓰루미’는 6층 건물에 고령자 주택 70채와 일반 임대주택 29채가 같이 들어가 있는 형태다. 해당 건물에는 공동 거실과 다세대 교류홀 등 세대 간 교류가 이뤄지는 공간까지 마련돼 있다. 핵가족, 1인 가족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제 각기 다른 연령과 세대들이 모여 사는 형태의 집합 주택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고령자 시설이 건물에 들어서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는 없을까. ‘코코판’의 모회사인 갓켄의 모치즈키 히사토요 씨는 “30년 전이라면 그런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됐다”며 “자신도 언젠가는 노인 시설로 들어가야 하니 지금 살고 있는 곳과 가까운 데에 노인 시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들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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