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중도세력이 많아져 사회에 보탬되는 정치 해달라”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6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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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시대] 김장하 前 남성문화재단 이사장 인터뷰
“열심히 부끄럼 없이 살면서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 중도세력이 중심을 잡아야죠
나무 죽이는 칼자루-도낏자루… 이런 손잡이가 되지는 말자
우리가 우리 앞길 망치지 말아야”

7일 자택 아파트 근처 카페에서 명신고등학교 졸업생을 만난 김장하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
7일 자택 아파트 근처 카페에서 명신고등학교 졸업생을 만난 김장하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공식 선거운동 시작 이틀 전인 지난달 10일 경남 진주시에 들러 김장하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81)과 함께 차를 마셨다. 바쁜 일정에도 시간을 쪼개 일부러 ‘어른 김장하’를 만나러 간 것이다. 이 대통령은 차담회 직후 “재밌는 말씀 하나를 해주시더라”고 말한 적이 있다. 김 전 이사장은 이 대통령과 구체적으로 무슨 얘기를 나눴고, 그런 말을 왜 했을까.

김 전 이사장은 대선 투표일 나흘 뒤인 7일 자택 아파트 근처의 한 카페에서 자신이 설립한 명신고등학교 졸업생들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 전 이사장은 1시간가량 이 대통령과의 차담회 과정과 대화 내용을 자세히 설명했다. 기자도 졸업생으로서 그 자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켰다.

● “평범한 중도 세력을 더 많이 만드는 정치”

김 전 이사장은 먼저 이 대통령에게 “어느 정도 시간이 되느냐”고 물었고, “30분”이라는 답변을 듣자 조금 길게 얘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돈 얘기를 했다. 내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예전에 읽었던 책의 권두사에 있던 내용이다.”

김 전 이사장이 다시 들려준 그 내용은 이렇다. “어떤 사람이 시장에서 오랜만에 사돈을 만나 바로 집으로 모시고 가서 식사를 대접했다. 사돈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고 버겁기는 마찬가지다. 편의상 주인 사돈과 손님 사돈이라고 하자. 사돈 내외가 겸상을 하고 밥을 먹었는데, 돌이 덜그럭 씹히는 소리가 났다. 민망하기 짝이 없던 주인 사돈이 당황해서 ‘아이고, 돌이 좀 많지요’라고 했다. 손님 사돈이 ‘아니올시다. 그래도 쌀이 더 많습니다’라고 답했다. (사돈끼리의) 우문현답이었다.”

김 전 이사장은 “여기서 쌀은 질서를 지키고, 정직한 삶을 살면서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비록 뛰어나진 못해도 사회를 살찌우고,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평범한 중도 세력이다. 이 후보한테 쌀이 더 많은 사회, 쌀이 더 많아져서 사회에 보탬이 돼서 우리나라를 발전시켜 달라고 말했다”라고 설명했다.

‘대통령이 되면 중도 세력을 더 많이 만드는 정치를 하라는 취지였느냐’라는 질문에 김 전 이사장은 “그렇지. 열심히 살고 또 바르게, 부끄럼 없이 살면서 국가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 뭐 특별한 사람이 되어서 나라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중도 세력이 중심을 잡아야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이제 대통령이 됐으니 그렇게 하겠지”라고도 했다.

● “요란한 소수가 다수 지배, 어떻게 할건가”

‘어른 김장하’의 삶은 서부경남 일대에선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스스로 공개되길 꺼려서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기 전까지 전국적인 지명도가 높진 않았다. 올해 4월 4일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파면 선고를 한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김장하 장학생’이라는 사실이 다시 알려진 이후 김 전 이사장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얼마 전 뮤지컬 ‘의기 논개’를 보러 갔는데, 관람객인 그에게 사인을 해달라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고 한다.

김 전 이사장은 퇴임한 문 전 권한대행을 지난달 2일 진주로 초청해 식사를 함께했다. 김 전 이사장은 그때 문 전 권한대행에게 “민주주의의 꽃은 다수결의 원칙인데, 요란한 소수가 조용한 다수를 지배한다. 어떻게 해결하실 건가”라고 물었다. 김 전 이사장은 “이 후보에게도 얘기했다. 우리 사회는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니까. 나라가 잘되게끔 판단해 주겠지”라고 말했다. 김 전 이사장을 30년 넘게 알고 지낸 한 인사는 “요란한 소수와 조용한 다수가 사돈 관계처럼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해 주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니냐. 그게 김 전 이사장이 요즘 던지는 화두 같다”고 해석했다.

● “우리가 우리의 앞길을 망치지 말아야 한다”

김 전 이사장이 대선 후보를 만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2년 대선 후보 때 사전 연락 없이 남성당 한약방을 찾아온 적이 있다. 김 전 이사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차 한잔 대접하고 아무 얘기도 안 했더니, 대통령을 모시고 온 분이 나중에 ‘왜 아무 말도 안 했느냐’고 하길래 ‘정치 9단한테 훈수를 두면 무슨 소용이냐’고 답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김 전 이사장은 노 전 대통령이 당선된 뒤에는 청와대 초대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이 후보의 면담 요청을 받아들이고, ‘쌀과 돌’ 이야기를 꺼냈다. 김 전 이사장은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다만 주변에선 비상계엄 등 특수한 정치적 상황 때문 아니었겠냐고 짐작할 뿐이다.

김 전 이사장은 ‘평범한 사람이 되려면 국민들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을 받고 다시 그가 읽었던 책의 한 문장을 언급했다. ‘나무야 나무야’라는 책에 있는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그러나 어느 생각 깊은 나무가 말했다…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라는 부분이다. 김 전 이사장은 “그걸 읽고 덜덜 떨렸고, 그 책을 문형배에게도 선물했다. 나무를 죽이는 칼자루, 도낏자루, 호미자루 이런 손잡이가 되지는 말자. 우리가 우리의 앞길을 열어 줘야지, 우리가 제자를 위해서 길을 열어 줘야지, 우리가 우리의 앞길을 망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극과 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끊임없이 진동한다. 진동을 멈출 때 생명을 다한다고 하지 않나”라고도 했다.

2022년 5월 남성당 한약방의 문을 닫고 난 뒤 허름한 식당에서 조촐한 송별 모임이 있었다. 그때 김 전 이사장은 “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열아홉 살 때부터 60년간 사실 너무 힘들었습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한 참석자는 그 자리에서 “여러 가지 유혹에도 참고 견뎌내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라는 생각에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한다. 김 전 이사장의 목소리가 울림이 있는 건 그게 좋은 말, 바른말이어서가 아니다. 온몸으로 보여준 삶을 짧고 함축적으로 표현했기 때문 아닐까.

“돈 쌓으면 구린내, 흩어지면 꽃”… 한약사로 모은 재산 사회환원
김장하는 누구
가난에 중학교 졸업후 한약방 점원
한약사 합격, 번 돈은 장학금으로
명신고 설립 100억 재산 국가 기증
지난달 10일 경남 진주시의 한 찻집에서 김장하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왼쪽)이 당시 이재명 대선 후보를 만나 악수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지난달 10일 경남 진주시의 한 찻집에서 김장하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왼쪽)이 당시 이재명 대선 후보를 만나 악수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내 운명을 바꾸며 살아온 일이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열아홉 살 때 한약사 시험을 친 일이고, 두 번째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심한 일이다.”

김장하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이 2008년 공개석상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경남 사천시 출생인 그는 가난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한약방의 점원으로 일하다가 한약사 시험에 합격해 1963년 10월부터 2022년 5월까지 진주시 등에서 한약방을 운영했다. 주 6, 7일을 근무하면서 돈을 모았다.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과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 돈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번 돈을 대부분 장학금에 썼다. 1960년대 후반부터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다. ‘김장하 장학생’은 1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히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그의 장학금 혜택을 받았는지조차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는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에게 한 말처럼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에게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내게 갚지 말고, 이 사회에 갚으라”고 강조해 왔다.

1984년에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해 1991년 아무런 조건 없이 100억 원대 재산을 국가에 기증했다. 이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경상국립대 등 지역 사회에 남은 재산을 기부했다. 남성(南星)은 보일 듯 말 듯한 남극노인성의 별자리에서 따온 말로 할아버지가 “앞에 나서지 말고 항상 제 역할을 하는 그런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지어준 아호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를 계기로 “돈은 쌓아 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사회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는 그의 말이 회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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