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 이익만 챙기는 ‘19세기 외교’가 닥쳤다
李 대통령이 답 찾아야 할 트럼프의 2가지 질문
①주한미군 대만 파병 때 한국은 뭘 도울 건가?
②핵폐기 미루고 美 때릴 ICBM만 먼저 폐기?
김승련 논설위원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날 2번의 기회가 사라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백악관의 대통령 당선 축하 메시지에 “중국의 간섭을 우려한다”는 대목이 찜찜하다. 동맹국에 대한 명백한 결례이지만, 새 정부에게서 느낀 중국 우호 기류를 견제하는 것 같아서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북-중-러를 적대시하고 일본 중심의 기이한 외교를 했다”는 ‘기이한’ 표현을 민주당이 탄핵소추문에 써 넣은 일이 있었다. 워싱턴에서 일으킨 파장이 백악관 생각에 큰 영향을 줬을 것이다. 이 대통령이 취임 후 한미일 협력을 강조하고, 한미동맹파를 일부 기용한 것은 긍정 평가받을 일이지만, 비중이 클 수는 없다.
이 대통령이 취임한 지금은 한국이 최대 수혜자였던 탈냉전 30년 자유무역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적어도 트럼프 정부하에선 동맹이라는 이유로 미국이 한국을 편들어 주는 시기도 아니다. 그렇기에 어느 때보다 대통령의 구상이 중요한데, 이 대통령은 진지한 언론에 체계적인 질문을 던질 기회를 대선 때 주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문재인 전 대통령보다 덜 이념적이다. 이 대통령이 1년 전 “중국에도 대만에도 셰셰(謝謝·고맙다) 하면 된다”고 말한 것은 실용적 사고에서 나온 진심이라고 믿는다. 굳이 중국과 척질 필요 없고, 경제 교류 늘리면 좋다고 여겼을 것이다. 문제는 타이밍이고, 대통령의 정세 판단 오류 가능성이다. 요새 국제정치학자들은 “(국제 규범을 강조하는) 화려한 위선의 시대는 가고, (강대국이 자기 이익만 챙기는) 정직한 야만의 시대가 왔다”는 말을 종종 한다.
미국의 향후 30년 주적은 중국이다. 중국이 패권 지위를 넘보는 걸 막기로 한 것이다. 트럼프건 바이든이건 똑같다. 미국은 이를 위해 대만과 주변 서(西)태평양 해역에서 중국 압박에 올인했다. 지난 30년처럼 중국에 첨단 제품 팔고, 러시아에서 값싼 원재자를 사는 게 더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트럼프는 국제법보다 주먹이 더 가까운 ‘19세기형 강대국 외교’를 불러왔다. 미국이 이란에 벙커버스터를 떨어뜨려 항복을 받아내고, 멀쩡한 파나마 운하와 그린란드의 영유권을 ‘근외(近外·near abroad)’ 정책의 이름으로 탐내는 세상이 왔다.
이 대통령은 한미동맹도 강화하고, 중국과 관계도 개선하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자주파와 동맹파가 함께하는 이런 ‘양손잡이 외교’는 쉽지 않다. 중국과 교류가 확대되고, 정부 간 접촉은 늘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행사와 의전을 넘어서서 중국의 본질적 이익에 기여할 때는 미국에 된서리 맞는 상황도 대비해야 한다. 미 국방장관이 “안보는 미국과 하면서 중국과 손잡고 돈 버는 시대는 갔다”고 압박하는 게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이재명 정부는 안보정책을 원점에서 실용의 이름으로 재검토할 기회를 맞았다. 강을 건넜으니 타고 온 뗏목은 버려도 된다는 경구는 경제 정책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조각(組閣) 등을 이유로 나토 참석을 미룬 것이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취임 100일 동안 과거 발언도 지우고, 백지 상태에서 새 그림을 짜야 한다. 대통령은 대중국 전략을 한미동맹파 외교관들에게 맡겼는데, 미국의 비판적 중국관을 고려한 결정으로 보인다. 반면 대북한 정책은 정동영 이종석 등 자주파에게 맡겼고, 취임 첫 주부터 대북 확성기 방송과 전단 살포를 중단시켰다. 김정은이 남북을 ‘적대적 두 국가’로 상정한 뒤 문을 닫은 지금 북한이 관계 개선 필요성을 느끼도록 해야 할 과제가 이들에게 주어졌다.
대통령실은 머잖아 한미 정상회담이 열릴 때 트럼프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가정한 뒤 준비해야 한다. 첫째, 미국은 대만 유사시에 주한미군을 급파할 텐데, 그때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둘째, 미국은 북핵 폐기는 장기 과제로 돌리는 가운데 미국을 핵공격 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없애는 대가로 대북 제재를 푸는 협상을 북한과 벌일 수도 있는데, 한국은 수용할 수 있나. 이재명 정부가 전자에 동의하면 중국이, 후자에 동의하면 국내 여론이 뒤집어질 일이다.
새 정부는 두 질문에 예스-노 답변이 아니라, 우리가 새로운 틀을 짜고 해법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 한미 간에 당장은 관세 및 투자협상 등 먹사니즘(먹고 사는 문제)이 현안이지만, 향후 1, 2년 내에 죽사니즘(죽고 사는 문제)이 기다리고 있다. 주한미군 주둔 분담금을 더 내라는 미국의 요구가 상대적으로 더 쉬워 보일 정도다. 첫 100일 가운데 벌써 20일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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