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025년 3월 1일)은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3.1절 의거가 일어난 지 106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00년 전 신문 기준으로는 6주년이 되는 날이었는데, 당시 신문에서는 그날을 기념할 수 있었을까 궁금했습니다. 1925년 신문을 찾아보니 일본 도쿄와 중국 상하이에서 동포들이 기념식을 했다는 소식이 3월 2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기념 행사를 했다는 소식은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미묘하게 의미를 담고 있는 사진이 하나 있었습니다. 같은 날 2면 상단에 실린 종로 거리 풍경 사진입니다. 배경으로 보아 종로2가 탑골공원 부근으로 추정됩니다. 사진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눈비 맞은 쓸쓸한 종로거리 - 어제 3월 1일은 마침 첫 공휴일이므로 종로 큰 거리에도 집집마다 문을 닫아 걸어 음산한 기운이 한량없이 돌았는데 부실부실 내리는 눈송이는 공중에서부터 비가 되어 새 봄을 맞이하는 탑동공원 남산공원 창경원 등의 나뭇가지에는 물에 젖은 눈송이가 힘없이 매달렸더라.
비록 3.1절을 직접적으로 기념하지는 못했지만, 상징적인 장소와 설명을 통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 100년 전 신문 속 세 명의 고령자 이야기
오늘 100년 사진이 고른 사진은 100세 가까운 노인들의 얼굴입니다. 1925년 2월 26일, 27일, 28일자 신문에는 90세를 넘긴 노인 세 명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고령자 생활 상태(1). 96세의 김씨 할머니
고령자 생활 상태(1)
●12살에 시집가 62살에 과부가 되다-음식을 가리지 않고 외출을 즐기는 96세 할머니, 69세 된 며느리의 이야기
서울 수송동 공립보통학교 왼쪽 길로 들어서서 왼편으로 꺾어지는 골목 끝에 위치한 청진동 206번지. 그곳의 대문을 지나 행랑채 단칸방에 사는 김씨 할머니(96세)는 엄성오(61세)의 어머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창문도 없는 어두운 단칸방이었다. 낡고 누렇게 변색된 신문지가 이곳저곳 붙어 있고, 대나무 발에는 붉은 빈대약이 칠해져 있었다. 방 한쪽에는 검은 때가 묻은 화로가 놓여 있고, 그 옆에 새하얗게 센 머리를 드러낸 김씨 할머니가 누워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그녀는 슬며시 일어나 앉으며 빙긋 웃었지만, 숨이 찬 듯 가쁜 숨소리를 내뱉었다. 그녀가 바로 올해 아흔여섯을 맞은 김씨 할머니였다.
●귀가 어두워도 건강한 몸, 서양식 옷을 두려워하다
몸이 불편해 보이기에 “누워 계세요”라고 권했지만, 그녀는 다시 한 번 빙긋 웃고는 아무 말 없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아들 엄성오 씨에게 누우시라고 권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아주 건강하십니다. 다만,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을 보면 무서워서 숨을 거칠게 쉬십니다. 귀가 잘 안 들리셔서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시지만, 몸은 튼튼하십니다.”
그는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다시 그녀의 나이를 확인하고자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라고 묻자, 김씨 할머니는 “나는 글을 몰라서 육십갑자를 세지 못하지만, 아흔여섯은 분명하다”고 대답했다. 아들 엄성오 씨는 올해 예순하나라고 하며 주름 하나 없는 얼굴로 다시 웃음을 지었다.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세 아들을 낳다
김씨 할머니는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85년 전, 열두 살 때 서울로 시집왔다. 남편은 당시 스물두 살로, 원래 가난한 집안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사 와 광화문 주석골에서 살았다고 한다. 남편은 42년 전, 예순두 살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자녀로는 원래 살아 있었다면 올해 일흔여덟이 될 맏아들, 그리고 현재 함께 사는 둘째 아들 엄성오(61세), 그리고 쉰두 살 된 셋째 아들이 있다. 셋째는 현재 하와이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한다.
●근면하고 성실했던 조상, 69세 며느리의 이야기
엄성오 씨의 아내, 올해 예순아홉인 며느리는 자리에 앉을 공간이 부족해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께서는 5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 종일 나무하러 다니셨지만, 몇 해 전부터 기력이 쇠해 외출을 못 하게 되셨어요. 그래도 나가고 싶어 하셔서 더운 날에는 혼자 자꾸 밖에 나가려 하시죠. 그래서 대문을 꼭 걸어 두고 있어요.
드시기야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저희와 함께 식사하시지만, 어린아이처럼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리세요. 요즘은 선산에 가는 것도 마다하시는데, 이번 한식에는 꼭 가고 싶다고 하시네요. 밤낮으로 조상 이야기를 하시지만, 워낙 형편이 어려워 차려 드릴 떡 한 조각도 못 사드리고 있어요.“
●손자는 상업통신사에 취직 준비 중
나는 “생계를 위해 어떤 일을 하십니까?”라고 묻자, 엄성오 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서점과 석탄가게 일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도, 제 아내도 모두 김해 김씨인데, 김해 김씨라서 가난한가 봅니다.”
마침 밖에서 젊은 청년이 들어오자 그는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 운학입니다. 올해 스물한 살인데 보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동야학을 다녔어요. 앞으로 상업통신사에 다닐 계획입니다.”
고령자 생활 상태(2). 91세의 정씨 할머니
고령자 생활 상태 (2)
●91세의 홍안 노파, 30년간 채식하며 살아온 삶
서울 수창동 59번지 내수사 옆에 사는 김성문(66) 씨의 집에는 올해 91세가 된 정송(鄭松)이라는 노파가 살고 있다. 그녀는 김성문 씨의 장모로, 기자가 찾아갔을 때 딸과 함께 콩나물 머리를 다듬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머리에는 아직도 검은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고, 분홍 저고리를 입고 있어 마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남편과의 이별, 그리고 다섯 딸과의 생이별
정송 노파는 열다섯 살 때, 자신보다 다섯 살 연상인 남편 이원일(李元一)과 수원에서 결혼했다. 이후 다섯 딸을 낳고 가정을 꾸렸으나, 그녀가 서른아홉이 되던 해 남편은 길을 떠난 뒤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다섯 딸을 모두 시집보냈으나, 임오년(壬午年) 군요(軍擾) 때 각자 피난을 가면서 소식을 잃고 말았다. 이후 딸들의 생사를 찾아 헤맸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삼십여 년 전, 갑신년에 서울로 시집간 막내딸과 연락이 닿아 현재까지 함께 지내고 있다.
●74세가 되었을 장녀, 그리고 긴 한숨
기자가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묻자, 그녀는 머리를 숙이며 “남양 땅 언창에서 살았습니다”라고 또렷이 대답했다. “따님들의 소식을 전혀 모르시나요?”라는 질문에는, 손을 멈추고 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맏딸이 살아 있다면 이제 일흔넷이지요. 하지만 어디에서 죽었는지, 삼십여 년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
자식들의 생사를 모른 채 90세가 넘도록 살아온 그녀의 마음속 깊은 한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30년간 채식하며 살아온 강인한 삶
정송 노파의 사위 김성문 씨는 긴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이분은 삼십여 년 전부터 고기를 전혀 드시지 않고 채식만 하십니다. 세월이 흘러 얼굴은 쪼그라들고 살점이 빠졌지만, 몸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아직도 눈과 귀가 밝고 말도 또렷하시죠. 다만 다리에 힘이 빠져 몇 해 전부터는 바깥 출입을 못 하고 계십니다.”
●사진 촬영을 앞두고 터진 웃음
기자가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사를 부르겠다고 하자, 딸이 농담 삼아 “어머니도 화장을 좀 하셔야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정송 노파는 “아이고, 부끄럽네”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문 앞에서 기자가 그녀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그녀는 의심스러운 듯 바라보며 다시 되물었다. “신문사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나이가 몇이오?”라고 다시 묻더니 또 한 번 호호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어찌나 우스운지, 옆에서 놀던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도 따라 웃었고, 기자 역시 웃음을 터뜨리며 밖으로 나왔다.
고령자 생활 상태(3). 95세 박씨 할머니
고령자 생활 상태 (3)
● 95세의 동안 노파, 70세 넘은 자녀와 함께 생활: 건강이 좋아 먹고 싶은 음식은 마음껏, 젊어서 고생한 덕에 오히려 건강 95세 동안(童顔) 노파 70세 넘은 남매, 정성껏 봉양
서울 혜화동 57번지, 동소문 안쪽 초가집에는 95세 된 박씨 노파가 살고 있다. 그는 이 집의 가장인 이원식(75세)의 어머니이며, 함께 사는 누나는 70세가 넘은 과부다. 즉, 일흔이 넘은 남매가 100세에 가까운 어머니를 정성껏 모시며 살고 있는 것이다. 장수자의 집을 묻자, 동네 사람들이 술집을 가리켜
눈이 소복이 쌓이는 저녁, 기자는 신선한 바깥공기를 마시며 동소문 안 이 집을 찾아갔다. 길에서 만난 몇몇 사람에게 “95세 된 노인이 사는 곳이 어디냐?”고 묻자, 모두가 한목소리로 “저기 보이는 술집입니다”라며 친절히 알려주었다. 이 노인은 동네 사람들의 자랑거리인 듯했다. 도시에서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를 만큼 개인주의적인데, 이곳은 농촌 같은 정이 느껴지는 마을이었다.
●남편은 늙은 총각, 자녀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
박씨는 70여 년 전, 19살 되던 해 임오년에 이씨 집안으로 시집왔다. 남편 이석근은 스물다섯 살의 늙은 총각이었다. 결혼 후 4년 만에 첫아들 이원식을 낳고, 3년 뒤 딸을 얻었다. 그러나 40세가 되던 해 과부가 되었고, 이후로는 아들과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딸과 함께 살았다.
●과거 덕수궁에서 일했던 아들, 지금은 약술 장사
아들 이원식은 한때 덕수궁에서 일하며 홀어머니를 모셨고, 딸은 들어와 술장사를 하며 어머니를 봉양했다. 장성한 손자는 구두 장인으로 돈을 잘 벌어 살림이 넉넉했다. 박씨 노파는 젊어서 고생한 덕에 몸이 튼튼했고, 동네를 돌아다닐 만큼 건강했다. 눈과 귀도 좋고, 먹고 싶은 음식은 가리지 않았다. 피곤하면 며칠 동안 방에 누워 쉬기도 했지만, 대체로 건강하게 지냈다. ●노년에도 고생스러운 삶, 왼손엔 은가락지
기자가 “한번 뵐 수 있을까요?” 묻자, 안에서 대화를 엿듣던 노파가 문을 열고 머리에 조바위를 쓴 채 얼굴을 내밀었다. “이렇게 늙도록 살아서 고생이지요. 호호.” 그는 환하게 웃으며 농담했다. 그 모습은 매우 건강해 보였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은가락지 한 쌍이 반짝였고, 허리춤에는 붉은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100년 전 노인들의 삶, 그리고 우리의 미래
1925년 당시 조선에서 100세 이상 인구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시 평균수명은 40대 중반에 불과했고, 의료 기술과 생활 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에 100세 이상 인구는 극히 드물었을 것입니다.1925년 2월 2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경성부 90세 이상의 고령자 10명’이라는 기사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 8명, 일본인 2명이 있었고 최고령자는 98세의 조선 할머니였습니다.
그러나 요즘 노령 인구는 급격히 늘고 있고 100세를 넘는 고령층도 두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2024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100세 이상 인구는 2019년 4,874명에서 2023년 7,634명으로 56.63% 증가했습니다. 특히 여성 노인이 남성보다 4.8배 많습니다.
100년 전 김씨, 정씨, 박씨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 노인들이 겪었던 현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도 경제적 어려움과 신체적 쇠약으로 인해 고단한 삶을 살아갔다. 사랑하는 이를 전란으로 잃거나 먼 곳에 떠나보내고도 다시 만나지 못하는 비극도 흔했습니다.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건강을 유지하며 살았던 할머니들의 적응력과 회복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씨 할머니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외출을 즐기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정송 노파는 30년간 채식을 하며 건강을 유지했습니다. 박씨 할머니는 젊어서 했던 육체 노동이 오히려 건강의 기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방식으로 건강을 유지할 계획이신가요?
오늘은 100년 전 어려운 상황에서도 100세에 가까운 나이까지 생존했던 할머니 세 분의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점이 느껴지셨나요? 좋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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